‘하이브리드 자동차’라는 얘기를 들으면 왠지 힘이 약할 것 같은 생각이 먼저 든다. 지금껏 나온 하이브리드 차(HEV)들은 대부분 ‘친환경’에 초점을 맞춰왔고, 높은 연료효율과 적은 배출가스가 평가의 척도였다. 당연히 빠르게 달리는 손 맛을 기대하긴 어렵다. 게다가 효율을 우선시한 독특한 생김새도 특징으로 자리잡았다. 꽤 오랜 시간 다져온 이미지다. 그러니 하이브리드 차 하면 떠오르는 단어가 ‘연비’나 ‘효율’일 수밖에 없다.
요즘엔 하이브리드 시스템이 달리기 ‘성능’을 높이는 방법으로도 쓰이고 있다. 배기량을 낮추면서 터보차저를 얹는 데 그치기 보단 전기 모터의 힘을 보태는 방식도 각광받고 있다. 전기 모터는 낮은 속도에서부터 높은 토크를 낼 수 있다. 전기(EV)만으로도 달릴 수 있으니 소음으로부터도 자유롭다. 엔진이 할 일을 전기 모터가 대신해주니 배출가스 양도 줄어든다. 여러 면에서 관심을 가질 만한 기술이다. 이런 움직임은 럭셔리 브랜드가 적극적이다. 차 값에 큰 영향을 받지 않는 독특한 시장에 포진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특징만 분명하다면 수요가 생긴다.
국내 출시된 럭셔리 하이브리드 SUV 두 대를 비교하며 특징을 체험해볼 수 있었다. 최고급 SUV의 대명사 ‘레인지로버’의 하이브리드 모델은 엄청난 힘을 자랑한다. 가솔린 모델일 것 같지만 디젤 하이브리드다. 그리고 스포츠카 브랜드 포르쉐도 하이브리드 SUV가 있다. 이중 플러그-인 하이브리드(PHEV) 버전 카이엔 S E-하이브리드를 탔다. V형6기통 가솔린 터보엔진에 전기 모터의 힘을 더한 모델이다.
레인지로버 하이브리드 vs 카이엔 S E-하이브리드
레인지로버 SDV6 하이브리드 보그 SE(Range Rover SDV6 Hybrid Vogue SE)는 배기량 2,993cc의 V6 터보 디젤 하이브리드 엔진을 얹어 최고출력 340마력(@4,000rpm)을 낸다. 최대토크는 무려 71.4kg.m(@1,500~3,000rpm)이다. 상위 모델인 4.4 V8 모델에 버금가는 성능이다. 이런 노력의 결과로 이산화탄소 배출량은 km당 190g이다. 비슷한 성능을 내는 4.4 SDV8 모델은 km당 최대 242.0g을 뿜어낸다. 복합연비는 리터 당 10.6km. 변속기는 8단 자동이며, 안전 최고시속은 218km다. 정지상태에서 시속 100km까지 도달 시간은 6.9초다.
포르쉐 카이엔 S E-하이브리드는 배기량 2,995cc의 V6 가솔린 터보 엔진이 탑재되고, 최고출력 333마력(@5,500~6,000rpm), 최대토크 44.9kg.m의 힘을 낸다. 여기에 95마력의 전기 모터가 힘을 보태 통합 출력 416마력을 자랑하며, 토크는 60.2kg.m로 높아진다. 성능만 놓고 보면 3.6리터 V8 카이엔 S와 비슷하지만 배출가스는 km당 188g으로 52g이나 줄어들었다. 변속기는 8단 팁트로닉이다. 안전 최고시속은 243km. 정지상태에서 시속 100km까지 도달하는 덴 5.9초가 걸린다.
두 차종 모두 상위 모델과 어깨를 견줄 만큼 강력한 힘을 자랑한다. 결국 퍼포먼스를 높이기 위해 하이브리드 시스템을 얹었더니 연료효율이 높아지고 배출가스까지 줄어드는 효과를 누렸다. 다운사이징의 새로운 방법인 셈이다.
느긋한 레인지로버, 바쁜 카이엔
주행감성은 다르다. 서로 추구하는 방향이 달라서다. 카이엔은 온로드 지향적이며 스포티하다. 가속할 때 짜릿함도 역시 포르쉐답다. 밟는 대로 나간다. 경쾌하고 절제된 서스펜션 움직임도 운전의 즐거움을 더한다. 운전대를 돌리면 원하는 만큼 반응한다. 차 무게가 2,425kg(공차중량)에 달하지만 무겁다는 느낌이 들지 않는다. 차를 이리저리 몰아붙여도 한 덩어리처럼 단단하게 움직인다. 군더더기가 없다. 아쉽게도 높낮이 조절 기능은 빠져있었다.
반대로 레인지로버는 상하 움직임 폭이 크다. 서스펜션 스트로크가 길어서 꽤 출렁인다. 한 박자 느긋한 움직임은 카이엔의 공격적인 주행감각과는 다른 맛이 있다. 이런 성향 탓에 오프로드에선 안정감이 좋다. 웬만한 충격은 다 걸러낸다. 바퀴가 헛돌기 쉬운 모래나 진흙 코스에선 상황에 맞춰 앞-뒤-좌-우 디퍼렌셜을 잠그며 각각의 바퀴에 힘을 나눠준다. 모니터로 바퀴 각도나 서스펜션 움직임, 디퍼렌셜 상황을 볼 수 있다. 뒷바퀴 움직임이 적극적이고, 차고 높낮이를 조절하는 정도에 따라 성격이 약간 달라진다. 디젤 하이브리드 답게 무게가 무려 2,890kg에 달한다. 출렁이지 않는 게 이상할 정도다.
그렇다보니 일상 운전에서 다루기 쉬운 건 카이엔 S E 하이브리드다. 길이x너비x높이가 4,855x1,939x1,705(mm)로 4,999x1,983x1,835(mm)의 레인지로버 하이브리드보다 덩치가 작다. 휠베이스도 2,895mm로 레인지로버의 2,922mm보다 짧다. 게다가 무게 차이도 465kg이나 난다. 작고 가벼우니 이래저래 다루기가 쉬울 수밖에 없다.
전기로 달리는 SUV
카이엔 S E 하이브리드는 플러그를 꽂아 충전할 수 있는 플러그-인 하이브리드 자동차다. 가정용 220v 플러그에 꽂으면 완전히 충전하는 데 세 시간 반쯤 걸린다. 달리면서도 충전할 수 있다. 전기 모터를 발전기로 쓰는 E-차지 모드를 활용하면 된다. 기름을 태워야 하지만 달리면서 배터리를 충전할 수 있으니 활용하기 나름이다. 배터리가 가득 차면 E-파워 모드를 제대로 느껴볼 수 있다. 배출가스 없이 최고시속 125km까지 달릴 수 있다. 주행 스타일에 따라 최저 18km부터 최대 36km까지 이동 가능하다.
레인지로버 하이브리드는 플러그를 통해 충전할 순 없지만 전기로만 움직이는 EV모드를 이용할 수 있다. 배터리 충전은 브레이크 회생 제동 시스템이 주로 맡고, 필요에 따라 엔진의 힘으로 전기를 발전시켜 충전할 수도 있다.
두 차종 모두 전기로 달릴 수 있다는 점은 공통된 재미요소다. 덩치 큰 SUV들이 엔진을 끈 채 달리는 모습은 꽤나 인상적이다. 가다서다를 반복하는 정체구간에서 슬금슬금 움직일 때, 고속도로에서 타력주행이 가능할 때 전기 모터의 힘 만으로 달리는 모습을 볼 수 있다.
화려함은 레인지로버의 승리
레인지로버 하이브리드의 밝은 회색 톤 인테리어는 호화롭다. 게다가 신기한 기능으로 무장했다.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것들은 죄다 들어있다. 앞/뒷좌석 모두 부드러운 감촉의 세미 애널린(Semi aniline) 가죽을 썼고, 히팅과 쿨링 기능이 있다. 센터콘솔엔 음료를 시원하게 즐길 수 있는 쿨링 박스도 달려있다. 서라운드 카메라 시스템, 사각지대 모니터링 시스템, 전후방 주차 보조장치, 파워 테일게이트에 평행&직각 주차 보조 기능, 360° 주차 거리 감지 기능까지 들어있다. 어댑티브 크루즈 컨트롤 덕에 막히는 구간에서도 알아서 페달을 밟아주니 꽤 편했다.
카이엔 S E 하이브리드는 고급스런 품목을 많이 빼 달리기 성능에 집중한 듯한 모습이다. 짙은 회색 인테리어와 알루미늄 장식들이 조화롭다. 계기반은 5실린더 타입으로 회전계가 가운데 자리했다. 패들 시프터가 달린 다기능 스포츠 스티어링 휠 디자인과 기능은 포르쉐의 새로운 상징 ‘918 스파이더’ 스티어링 휠에 기초를 뒀다. 그리고 뒷좌석 통풍시트를 비롯한 여러 품목을 별도로 추가 주문할 수 있다.
그리고 레인지로버와 카이엔 모두 계기반은 하이브리드 모델답다. 밝은 연두색을 포인트 컬러로 썼고, 충전 정도와 하이브리드 시스템의 작동 상태를 모니터를 통해 눈으로 확인할 수 있다. 스포티한 느낌의 카이엔 계기반은 아날로그와 디지털을 섞었고, 반면 레인지로버는 풀 LCD로 필요한 정보를 효율적으로 전달한다.
카이엔의 운전석은 비행기 조종석처럼 이런저런 버튼이 많다. 처음엔 불편할 수 있지만 적응 되면 꽤 편하다. 버튼 느낌이 다르다. 레인지로버는 웅장한 느낌을 준다. 큰 배를 타는 느낌이랄까. 단순함 속 여러 개의 동그란 실버링으로 지루함을 덜어냈다.
럭셔리 브랜드가 디테일에 강한 이유
두 차종 모두 디테일에 강하다. 손이 닿는 곳, 시선이 머무는 곳은 모두 고급스럽고 편안한 느낌을 준다. 그러면서도 브랜드의 정체성을 고스란히 담아냈다. 사소한 곳도 예외가 아니다. 보이지 않는 곳의 마감까지도 고급스럽고 깔끔하다. 게다가 멋진 사운드와 향기까지. 함께하는 내내 감탄사가 쏟아진다. 다섯 가지 감각 중 무려 네 가지나 만족시킨다.
럭셔리 브랜드가 디테일에 강한 이유는 이미 틀을 정해놓고 채워 넣어야 하기 때문이다. 차를 만드는 사람들의 고민 또한 이만 저만이 아닐 거다. 오랜 시간 사람들의 머릿속에 각인돼온 것들. 그래서 겉이나 속이나 이미 정해진 게 있고, 그러면서도 사람들의 기대 이상으로 발전되는 브랜드 정체성까지 보여줘야 한다. 자연스레 디테일에 더 신경 쓸 수밖에 없는 이유다.
글
박찬규 star@ridema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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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드매거진(ridema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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