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pdated. 2023.6.1 목 14: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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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동차 본연의 재미에 집중하다, 토요타 GR86

대중매체가 판매량에 영향을 주는 것이 놀라운 일은 아니다. 최근에는 PPL(Product Placement)와 같은 마케팅 방식을 통해 각 브랜드에서 자사의 제품을 자연스럽게 노출시키기 위해 노력하고 있고, 이런 영향으로 판매량에 큰 변화가 나타나기도 한다. 과거에는 이런 PPL 외에도 의도하지 않은 노출로 인해 판매량에 영향을 주는 사례도 적지 않았다.

86 시리즈의 원조격인 스프린터 토레노. 'AE86'이라는 코드명으로 잘 알려져있다

자동차 마니아라면 한 번쯤 봤을 만한 일반도로 레이스를 소재로 한 만화 ‘이니셜 D’도 대표적인 사례 중 하나다. 두부집 아들인 주인공이 제품을 배달하며 쌓은 실력으로 등장인물들과 레이스를 펼치며 성장해나가는 이야기를 담은 것으로, 작가 역시 자동차 마니아여서 작품 내에 다양한 차량들이 등장하지만 그 중에서 가장 눈에 띄는 차는 역시 작가가 실제 소장한 모델이자 주인공의 차량으로 등장한 토요타 스프린터 트레노, 일명 ‘AE86’이 아닐까. 1983년에 나온 오래된 이 차는 1987년에 단종됐지만, 이 만화로 인기가 높아지며 중고시장에서 매물을 찾아보기란 하늘의 별따기가 됐다. 최근에는 신차급 컨디션의 중고 매물이 신형의 신차 가격보다 비싸게 거래가 됐을 정도라고.

이런 높은 인기에 복각판을 출시하는 것이 아닌가 기대하는 목소리가 높았으나, 토요타에서는 2012년 AE86의 콘셉트인 ‘경량, 소형, FR’을 가져와 86이라는 모델을 출시했다. 국내에도 출시되어 마니아들에게 인기를 얻었는데, 이 86이 10년 만에 세대변경과 함께 GR86이라는 이름으로 바뀌어 돌아왔다. 토요타의 고성능 브랜드인 ‘GR’을 이름에 더했을 정도면 무언가 달라진 점이 적지 않을 터, 무엇이 달라졌을지 직접 확인해보기 위해 우선 지난 5월 16일 서울 강남의 카페 캠프통에서 진행된 미디어 쇼케이스 행사를 찾았다.

이번 신형에서 가장 주목할만한 점은 ‘수동변속기 모델’이라는 점이다. 자동변속기를 절대적으로 선호하는 국내 시장의 특성상 신차에서 수동변속기를 선택할 수 있는 제품을 찾기가 쉽지 않은데, 이번 GR86은 놀랍게도 전 사양 모두 수동변속기만 발매하는 쪽을 선택했다. 편의성을 높이지만 재미를 떨어뜨리는 자동변속기를 과감히 포기하고 재미를 높이는 수동변속기를 선택한 것. 일반 소비자보다는 마니아층에 어필할 모델인 만큼 토요타의 과감한 선택에 박수를 보낸다.

외관 디자인은 이전 모델과 달리 훨씬 날카로워진 표정과 볼륨감을 높인 차체가 인상적이다. 전면부와는 다른 느낌을 주던 후면부도 날카로운 모습으로 다듬어 디자인에 통일성을 부여했다. 실내는 강산도 한 번 바뀔만한 긴 시간에 맞게 많은 부분이 바뀌었다. 특히 디지털 디스플레이가 더해진 계기판과 센터 디스플레이, LCD를 내장한 공조장치 다이얼 등 많은 부분이 변화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대단히 세련된 느낌을 주거나 하는 구성은 아니지만, 스포츠 주행 중심의 모델이기도 하고 필요한 요소들은 충분히 갖추고 있으니 큰 불만은 없다.

엔진도 업그레이드됐다. 기존의 2.0L 수평대향 4기통 자연흡기 엔진의 배기량을 2.4L로 높여 최고출력 231마력/7,000rpm, 최대토크 25.5kg‧m/3,700rpm으로 성능이 향상됐다. 또한 고회전대의 가속력과 응답성이 개선됐고, 변속기 클러치 용량과 기어 강도를 높였다고. 여기에 GR86 전용의 FR 플랫폼을 새롭게 개발해 차량의 무게중심과 시트 포지션을 낮춰 코너링이나 고속에서도 안정적으로 주행할 수 있다고 한다.

그렇다면 정말 잘 달리는지, 덧붙은 GR의 이름이 허명은 아닌지 확인해봐야 한다. 전시 행사 바로 다음날인 5월 17일, 강원도 인제스피디움에서 ‘GR86 & RAV4 하이브리드 시승회’가 개최됐다. 트랙 안과 밖 양쪽에 다양한 코스들을 마련해 다양한 방법으로 GR86의 성능을 체험할 수 있게 준비되어 있었다. 함께 마련된 2022년형 라브4 역시 요즘같은 고유가 시대에 주목받는 모델이지만, 오늘의 주인공이 워낙 눈에 띄는 모델이다 보니 시선이 덜 가게 되는 건 어쩔 수 없다.

가장 먼저 GR86을 타고 트랙을 달려보았다. 수동변속기 모델을 처음 운전해보는 건 아니지만 트랙에서의 운전은 처음인지라 긴장되지 않을 수 없었다. 다행히 인스트럭터가 동승해 변속 타이밍을 알려준 덕분에 부담을 덜고 코스를 따라갈 수 있었다. 앞차와 거리를 유지하며 같은 라인으로 달리는 건 이런 트랙 체험 주행의 기본인데, 여기에 변속기까지 신경 써야 하니 마음이 더 바빠진다. 다행히 놓치기 쉬운 변속 타이밍을 옆에서 알려주니 가속은 문제없는데, 클러치 컨트롤이 좀처럼 쉽지 않아 감속 때마다 차의 움직임이 거칠어지는 건 어찌할 수 없었다. 더 부드러운 클러치 조작과 레브 매칭 같은 기술들을 더해야 부드럽게 달릴 수 있는데, 아직 거기까진 기술이 미치지 못하기 때문에 다운 시프트 때마다 차체가 거칠게 요동친다. 그래도 조금씩 익숙해지니 수동변속기도 나름의 재미, 특히 원하는 단수로 착착 밀어 넣는 손맛이 꽤 좋다. 물론 시내에선 불편함이 상당하겠지만, 서킷에서라면 이런 수동변속기가 더 재밌게, 즐겁게 달릴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수평대향 4기통 엔진은 자연흡기다운 반응이 좋다. 터보차저가 일상화된 요즘이지만, 터보 랙 없이 즉각적인 반응을 보여주는 자연흡기 방식의 제품이 아직도 이어지는 건 이런 이유 때문일 것이다. 코너를 빠져나와 회전수를 높이며 변속하는 과정에서의 엔진 사운드가 불편하지 않은 건 과정들에서 느끼는 재미 때문일 것이다. 이렇게 수동변속기에 대해 재미를 느끼는가 했는데 아쉽게도 트랙 체험은 끝. 항상 아쉬움이 남는다.

트랙 주행을 마치고 다음으로 이어진 체험은 슬라럼이다. 코스에 늘어놓은 고무콘을 이리저리 피해가며 누가 더 빨리 주행하는지를 겨루는 것인데, 좁은 공간에서 진행되는 만큼 빠른 속도보다는 정확한 가속과 감속, 스티어링 휠 조작이 중요하다. 첫 번째 코스 파악을 위한 연습 주행을 마치고 조금 속도를 높여보았다. 확실히 머리를 돌려나가는 것이 빠르고 신속하다. 여기에 두 번째 시승한 차량은 차량의 운동성능에 영향을 주는 퍼포먼스 댐퍼 등의 옵션 파츠들이 더한 모델이라 예상하던 움직임이 그대로 나타난다. 물론 욕심을 부리면 여지없이 뒤가 미끄러지긴 하지만 과하지 않게 미끄러지니 그것 또한 재미다. GR86은 재미를 느낄 수 있도록 일부러 오버스티어 성향으로 세팅했다고 하는데, 1세대나 2세대 모두 AE86과의 연관성은 이름과 콘셉트 정도지만 그 콘셉트를 제대로 담아놨다는 생각이 든다.

모터사이클로 유명한 야마하에서 제작한 퍼포먼스 댐퍼로 차량의 운동 성능을 높였다

슬라럼을 마치고 다음은 드리프트 차례다. 직접 경험하기엔 공간이 좁아 자칫 위험할 수 있어 인스트럭터의 옆에 동승해 움직임을 보는 정도로 만족해야 했다. 무언가 특별한 것을 기대했지만, 보여주는 내용은 간단한 기초 수준으로, 스티어링 휠을 완전히 꺾은 상태에서 가속하면 후륜 구동의 특성으로 자연스럽게 뒷바퀴가 미끄러지며 드리프트를 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물론 좀 더 오래, 길게 하기 위해선 섬세한 조작이 필요하지만 그런 부담 없이도 쉽게 드리프트를 시도해볼 수 있다는 점에서 GR86의 목표가 잘 달리는 쪽과 재밌게 달리는 쪽 중 어디에 위치해있는지를 확실히 느낄 수 있었다.

자동차는 ‘이상’적인 모델이 있고, 반대로 ‘현실’적인 모델이 있다. 오늘 시승한 GR86쪽은 현실과는 거리가 있는, 이상에 가까운 모델이다. 달리는 재미에 오롯이 초점을 맞추고 개발된 새로운 86에 토요타의 고성능 브랜드 가주 레이싱(Gazoo Racing)의 손길을 더한 이 GR86이야말로 철저하게 자동차 마니아들의 이상에 입각해 만들어진 모델이다. 여기에 잘 달리는 모델과 재밌게 달리는 모델 중에서는 후자에 속한다. 잘 달리는 것을, 경쟁자보다 더 빠른 기록을 목표로 했다면 엔진에 터보차저를 더해 성능을 끌어올리고 최대한 중립적인 핸들링을 보여주는 쪽으로 세팅했겠지만, 굳이 FR(앞 엔진 뒷바퀴굴림) 방식을 유지하면서 뒷바퀴를 잘 미끄러뜨릴 수 있는 구성을 가져간다는 점만 봐도 타 브랜드들과 다른 생각을 가진 개발진들의 시각을 조금은 느낄 수 있다.

달리는 즐거움을 남들보다 더 빠르게, 더 잘 달리고자 하는 것이 아닌, 달리는 과정 자체에서, 자동차를 내 마음대로 컨트롤하는 것에서 느끼고자 하는 사람들이라면 이번 GR86이 재밌는 장난감이 되어줄 수 있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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