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전거 업계 종사자와 일반 자전거 동호인이 바라보는 타이완 자전거 메이커의 이미지는 전혀 다를 것이라고 생각된다. 아마 많은 자전거 동호인들은 타이완 브랜드가 유럽이나 미국 브랜드 제품만 못할 것이라 생각하겠지만, 타이완의 자전거 메이커들은 유럽이나 미국의 브랜드 고급 자전거의 OEM 생산 뿐 아니라 디자인과 새로운 기술의 개발에도 많은 투자를 해왔다.
: 타이베이 사이클 d&i 어워드를 수상한 자이언트의 여성용 트라이애슬론 바이크 AVOW. 자이언트는 세계 최고의 자전거 기술개발 역량을 가진 메이커 중 하나다. 타이완 자전거 메이커들은 OEM 생산 뿐 아니라 자전거 개발에도 뛰어난 역량을 보여주고 있다. 유럽 브랜드의 자전거들 중 타이완 자전거 메이커가 대신 개발했다고 알려진 것들도 있지만, 해당 브랜드에서는 이 같은 ‘개발 비화’를 철저히 감춘다.
타이완의 가장 유명한 자전거 메이커라면 자이언트나 메리다를 들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자이언트와 같은 대형 자전거 메이커의 공장에서는 해당 브랜드의 자전거만 생산되는 것이 아니다. 투르 드 프랑스와 같은 세계 최고의 무대에서 활약하는 ‘자이언트의 라이벌’ 중에 실제로는 자이언트 공장에서 만들어진 제품들이 다수 있다는 것은 업계에선 잘 알려진 이야기다. 단순히 예를 든 것이 아니라 실제로 타이완 자전거 메이커들은 다양한 브랜드의 자전거를 위탁생산하며 심지어 신모델의 개발을 대행하는 경우도 있다.
'YOUR BRAND' here
: 카보텍이라는 이름의 자전거가 세계 레이스 계를 제패한 적은 없다. 하지만 월드챔피언십을 포함한 수많은 레이스를 제패한 유럽 브랜드의 몇몇 레이스 프레임이 카보텍에서 만들어진다.
만약 필자가 지금까지 없었던 ‘RIDE'라는 새로운 자전거 브랜드를 런칭하고 싶다면? 가장 쉽고 빠른 길은 타이완 자전거 메이커를 만나는 것이다. 마치 ’아바타 캐릭터‘를 만드는 것처럼 쇼핑하듯 부품을 골라 새로운 타입의 자전거를 만들 수도 있다. 실제로 브랜드는 다르지만 같은 공장, 같은 생산라인에서 같은 기술로 만들어진 자전거들이 전 세계 각지에서 판매된다.
: 브랜드가 없는 카본 프레임들. 타이베이 사이클 쇼 현장에 이 같은 카본 프레임을 출품한 현지 메이커는 굉장히 많다. 주문한 프레임의 스펙에 따라 가격이 천차만별로 달라지기도 한다.
알리 익스프레스와 같은 중국의 오픈마켓에서 아무 브랜드가 붙어있지 않은 카본 프레임이나 휠세트 같은 제품들을 저렴하게 구입할 수 있다는 사실은 국내 동호인들에게도 잘 알려져 있다. 그러나 이 같은 ‘NO BRAND' 제품 중에는 실제로 품질을 믿고 구입할 수 있는 제품이 많지 않으며 개중에는 유명한 제품을 불법으로 복제한 ‘짝퉁’도 다수 있다. 일단 ‘불법으로 생산된’ 제품이라면 정상적인 방법과 경로로 생산과 유통이 불가능한 만큼 품질을 제대로 보증할 수 없다는 것이 업계의 정설이다.
: 알루미늄 프레임으로 유명한 키네시스의 부스
: 키네시스의 올마운틴 풀서스펜션 프레임. 이와 동일한 구조의 모델을 현장에 전시된 다른 여러 브랜드에서도 확인할 수 있었다.
때로는 생전 처음 들어보는 메이커들의 프레임이나 휠세트도 만나볼 수 있는데, 개중에서도 ‘아이딜(IDEAL)’이나 ‘아스트로(ASTRO)’, ‘키네시스(KINESIS)’같은 메이커들은 쇼 현장에 커다란 부스를 차려놓고 다양한 제품을 전시한다. 이외에도 ‘JHK’니 ‘K&K’같은 이름의 수많은 자전거 메이커들이 프레임 등을 전시하는데 이같은 메이커들 중에는 필자도 생전 처음 들어보는 이름이 많다.
: 아스트로의 올마운틴 카본 프레임. 리어쇽 장착부의 한쪽 측면을 완전히 개방한 독특한 디자인이 재미있다. 스페셜라이즈드가 다운힐 자전거에 적용한 것과 비슷한 디자인이다.
소량의 샘플이 유통된 경우를 제외한다면 ‘아스트로’나 ‘키네시스’ 같은 대만 메이커의 이름이 적힌 자전거를 우리나라에서 만나기란 쉽지 않다. 그러나 실제로는 이들 메이커가 생산한 자전거는 국내 자전거 시장에서도 흔히 만날 수 있다. 단, 여러 가지 다른 브랜드의 상표를 뒤집어쓰고 있기 때문에 알아볼 수 없을 뿐이다. 이들 자전거 메이커는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자전거 브랜드를 비롯해 미국이나 유럽의 유명 메이커 제품까지 OEM 생산한다.
: 트리곤의 카본 프레임들. 국내에서 판매되는 모델과는 디자인이 다르다. 주문자의 요구에 따라 다양한 제품을 맞춤 생산하는 타이완 메이커들의 강점을 엿볼 수 있다.
: 트리곤의 타임트라이얼 프레임
: 트리곤의 에어로 트랙 핸들바. 디자인과 마감의 수준이 무척 뛰어나다.
또한 일부 자전거 메이커들은 OEM 뿐 아니라 독자적인 브랜드를 통해 제품을 알리고 가치를 높이려는 노력을 꾸준히 해오고 있다. 트리곤이나 프로라이트와 같은 자전거 메이커는 타이완 브랜드지만 국내에도 많은 라이더들이 브랜드를 인지하고 있으며, 합리적인 가격에 우수한 품질의 자전거를 공급하는 것으로 잘 알려져 있다.
이 같은 타이완 자전거 메이커의 행보를 살펴보면서 문득 국내에서 자전거의 생산을 시도했던, 혹은 현재 진행 중인 메이커들의 모습이 떠올랐다. 한때 타이완 자전거 메이커들은 실력은 있지만 초라한 브랜딩으로 세계 자전거 시장에서 이류 취급을 받기도 했다. 그러나 이제는 더욱 세련되게 다듬어진 디자인을 입고 변신을 시도하며 가치를 높이고 있는데 그 바탕이 되는 것은 자전거에 대한 높은 이해도다.
그러나 국내에서 자전거의 자체 생산을 시도하는 몇몇 메이커들은 ‘자칭’ 뛰어난 기술력을 강조하지만 정작 내부에는 자전거 디자인의 전문가조차 없다는 현실을 직시해야 한다. 아무리 소재를 잘 다루더라도 트렌드에서 벗어난 신기술 개발과 디테일의 낮은 완성도로는 결코 세계 자전거 시장에서 인정받기 어려울 것이다.
전기자전거 시장의 고속성장
: 아스트로의 전기자전거 프레임. 시마노 스텝스, 콘티넨탈, 보쉬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모터 유닛을 탑재할 수 있다.
올해 타이베이 사이클 쇼에서 특히 인상 깊었던 점을 꼽으라면 ‘전기자전거’ 프레임을 만드는 메이커들이 굉장히 많았다는 것이다. 일반적인 자전거 프레임과는 달리 크랭크가 장착될 ‘BB셸’이 있어야 할 곳에 상자 형태의 독특한 구조물이 부착된 자전거 프레임들을 어디에서나 쉽게 볼 수 있었는데, 이 같은 프레임에 ‘모터 유닛’과 배터리를 장착하면 전기자전거가 완성된다.
: 타이완 자전거 메이커 AXMAN의 전기산악자전거. 모터 유니트는 독일 브로스(BROSE)의 e-바이크 시스템을 장착했다.
일단 최근 전기자전거 시장의 동향을 살펴보자면, 전기자전거의 가장 큰 고객은 유럽의 라이더들이며 모터가 자전거의 중심에 장착되어 페달을 밟을 때 때 힘을 보조해주는 ‘페달링 어시스트’ 방식이 주를 이룬다. 국내에는 핸들에 ‘스로틀’ 그립이 장착되어 페달링을 하지 않아도 자전거가 모터의 힘으로 달릴 수 있는 제품들이 큰 인기를 얻고 있지만, 유럽에서는 페달링을 하지 않아도 자력으로 달릴 수 있는 전기자전거가 ‘전기스쿠터’로 분류되고 사용이 금지된 경우가 많다. 또한 바퀴가 아닌 크랭크에 모터가 장착된 자전거의 경우 가장 자연스럽게 힘을 보태줄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 프레임에 모터 유닛을 장착하기만 하면 전기자전거가 만들어진다. 어떤 메이커라도 손쉽게 전기자전거를 개발할 수 있다. 단, 다른 전기자전거 메이커 역시 동일한 모터유닛을 사용할 경우 성능의 차별화 요소를 만들어내기 어렵다.
이전에는 수많은 전기자전거 메이커들이 각각 독자적인 기술을 개발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하지만 이제는 복잡한 전기모터와 컨트롤 시스템을 직접 개발할 필요가 없이 ‘모터 유닛’을 장착하기만 하면 손쉽게 전기자전거를 만들 수 있다.
: 전기자전거를 위한 시마노의 스텝스(STEPS) 구동계의 개요도.사실 전기자전거를 장르를 처음으로 개척한 것은 야마하와 파나소닉과 같은 일본의 자전거 메이커들이지만 초기의 일본 자전거 메이커들이 자체 브랜드의 전기자전거 생산과 판매에 집중한 반면, 독일의 보쉬(BOSCH)와 같은 메이커들은 표준화된 ‘모터 유닛’을 개발해 여러 자전거 메이커에 공급하는 전략으로 후발주자지만 빠르게 세계 전기자전거 시장을 장악했다.
: 스텝스가 장착된 실물 자전거가 전시되어 눈길을 끌었다.
일본의 시마노 역시 조금 늦었지만 ‘스텝스(STEPS)’라는 전기자전거용 컴포넌트와 모터 유닛을 공급하기 시작했고, 아마 자전거 시장에서 시마노의 영향력과 소비자들의 신뢰를 생각한다면 금방 전기자전거 시장의 거인으로 우뚝 서게 될 것이라 예상된다. 이외에도 콘티넨탈, 파나소닉 등의 메이커를 비롯해 타이완 현지의 여러 자전거 메이커들도 다양한 전기자전거용 모터 유닛을 선보였다. 이 같은 전기모터 유닛의 장점이라면? 직접 새로운 전기자전거 기술을 개발하기위해 많은 시간과 비용을 들일 필요 없이, 블록을 조립하듯 부품을 선택해 조합하는 것만으로 새로운 전기자전거 모델을 만들어낼 수 있다는 점 아닐까?
: BESV의 전기자전거는 범용 모터 유닛이 아닌 독자규격의 전기모터 시스템을 탑재했다. 개발비용이 많이 들지만, 디자인과 성능의 차별화를 시도할 수 있다. 사진의 모델은 BESV CF1. 2015 차이나 사이클 어워드, 그리고 타이베이 사이클 d&i 어워드 골드를 수상한 전기자전거다.
: 버튼 하나의 심플한 인터페이스에서 체인을 완전히 감싼 커버까지 ‘자전거의 디테일의 아름다움’을 여주는 디자인
이 같은 전기모터 유닛이 ‘범용’ 전기자전거를 위한 것이라면 차별화된 디자인과 기술로 이목을 사로잡는 전기자전거 메이커들도 있다. 그 중 가장 주목할 만한 브랜드를 꼽으라면 필자는 타이완 다폰전자의 ‘BESV‘를 고르는데 주저하지 않겠다.
: BESV의 다양한 모델이 전시되었다. 주목할 점은 각자 다른 모델이지만 유로바이크, 차이나 사이클 어워드, 타이베이 사이클 d&i 등 수많은 상들을 수상했다는 점이다.
BESV 전기자전거는 이미 세계 최대 자전거 시장인 유럽과 중국에서 디자인과 품질을 인정받았다. 어쩌면 ‘이와 비슷한 제품을 우리나라에서도 본 것 같은데?’라고 생각하는 이가 있을지도 모른다. 필자 역시 3, 4년 정도 전에 국내 전기자전거 메이커의 제품 중 BESV 자전거 라인업의 몇몇 제품과 비슷한 것을 본 기억이 있다.
우리나라 자전거 기업들이 국내 시장에서 메이드 인 코리아를 강조할 때 타이완 자전거 메이커들은 철저하게 유럽과 미국시장을 공략해왔다. 심지어 공식 홈페이지도 영문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다양한 기능과 옵션으로 고급화를 추구했다. BESV 자전거 모델 중에는 우리 돈으로 500만원이 넘는 고가 제품도 있으며 타이완 내수용으로는 적합하지 않을지언정 유럽 시장에서는 충분히 가치를 인정받는다. 또한 급성장하는 초대형 시장인 중국에서도 ‘최고의 전기자전거’로 인정받았다.
이미 우리나라의 자전거 산업은 경쟁력을 잃은 지 오래이며, 이제 와서 타이완의 자전거산업과 비교하는 것이 별 의미가 없다는 생각을 할 수도 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최근 우리나라의 자전거 붐을 게기로 ‘대한민국의 뛰어난 기술력’이 바탕이 된다면 세계 전기자전거 시장에서 우위를 차지할 수 있다는 핑크빛 전망으로 제품 개발을 시도하는 기업이나 개발자들을 종종 만나곤 한다. 그러나 인정할 것은 인정해야 한다. 타이완은 이미 전기자전거와 다양한 스마트한 탈 것 분야에서도 우리나라를 훨씬 앞서나가고 있다.
전기자전거의 넥스트 스텝, 세계 자전거 시장의 미래 트렌드는 무엇이 될까? 아무도 답을 주지 않을 것이기에 결론은 스스로 내야만 한다. 타이베이 사이클 쇼에 전시된 제품, 그리고 그 너머 타이완 기업들이 치열한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어떻게 변화해나가는지를 매년 꾸준히 관찰하다보면 앞으로 우리나라의 자전거 기업들이 어떤 방향으로 나가야 할지에 대한 힌트를 얻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글
장낙규 rockyou@ridemag.co.kr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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