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클링 팬이 아니더라도 ‘한계에 도전하는 스포츠맨’의 이야기는 사람의 마음을 끌어당기기 마련이다. 그렇다면 자전거에 있어서 한계란 무엇일까, 아마 스피드와 시간이라는 두 단어로 표현할 수 있지 않을까? 불과 수 십초 동안 벨로드롬을 질주하는 트랙 선수건, 며칠에 걸쳐 장거리를 달리는 투어 사이클리스트건 추구하는 목표는 하나다. 더 빠르게 달려 더 빨리 골인하는 것이다.

가장 가혹한 레이스는 라이벌이 아닌, 자신의 한계와 싸우는 것이라고 한다. 그래서 사이클링 스포츠에서는 ‘원 아워 레코드(One Hour Record, 이하 아워 레코드)'를 가장 어려운 종목이라 말한다. 아워 레코드란 라이벌을 제치고 골인지점까지 빨리 달리는 종목이 아니다. 1시간동안 얼마나 멀리 달릴 수 있는지를 겨루는 종목이다. ’불과 1시간의 주행인데 뭐가 그리 힘들지?‘라고 생각하는 분도 있을 것 같다.

라이벌과의 대결이라면 0.01초만 빨리 피니쉬라인을 통과하면 승리할 수 있다. 곁에 있는 동료 선수에게 의지할 수도 있고, 암묵적인 합의를 통해 모든 선수들이 함께 페이스를 늦춰 달리다가 피니쉬라인 직전에서의 스프린트 경쟁으로 누가 더 빠른지 우열을 가릴 수도 있다.







그러나 아워 레코드는 라이벌도 동료도 없는 혼자만의 고독한 레이스다. 출발을 알리는 총소리가 들리는 순간 남은 시간을 보여주는 시계의 숫자는 59분 59초를 가리키고, 시간은 쏜살같이 달아나기 시작한다. 한계속도를 내면서도 이를 1시간동안 유지하며 달려야 하는데, 잠시도 쉴 틈도 없이 다리근육을 쥐어짜는 지옥 같은 고통을 견뎌야 한다.








과거 모든 레이스의 우승컵을 독식한 식인종이라 불린 전설적인 사이클리스트 에디 메르크스가 1972년 멕시코에서 아워 레코드 세계신기록을 갱신했을 때 한 말이 있다. 두 번 다시 아워 레코드에는 도전하지 않겠다고. 알프스와 피레네의 산길을 신들린 듯 오르던 챔피언조차 1시간동안 자신의 한계를 마주하며 달리는 것이 더욱 고통스럽다고 말했다. 강철 같은 정신력과 체력이 없다면 아워 레코드 신기록을 달성한 챔피언이 되기는 불가능하다.



옌스 보이트, 불굴의 영혼을 가진 레이서








옌스 보이트(Jens Voigt)는 독일출신의 사이클리스트다. 1997년 프로 데뷔하여 올해로 18년째를 맞이했다. 유럽에서는 일반적으로 프로사이클리스트가 최고의 실력을 발휘하는 나이를 30대 초반이라고 보지만 1971년생인 옌스는 올해로 43세, 사이클리스트로서 불혹의 나이를 맞이했다.







그러나 옌스 보이트는 여전히 수많은 사이클링 팬들의 인기를 독차지하는 사이클리스트 중 한명이다. 옌스는 월드챔피언이나 그랜드투어 종합 우승 같은 대형 타이틀을 가진 선수가 아니지만, 누구도 앞에 나서고 싶어 하지 않는 혹독한 레이스일수록 투지를 발산하며 달린다. 강한 바람이 부는 날 모두가 커다란 그룹으로 뭉쳐 달릴 때, 옌스는 펠로톤에서 홀로 뛰쳐나가 후방에서 추격해오는 거대한 집단을 따돌리며 피니쉬라인을 향해 질주한다. 이렇게 불꽃처럼 뜨거운 브레이크어웨이를 통해 얻은 승리만 70번이 넘는다.







옌스 보이트의 자전거에 적혀있던 ‘Shut up, Legs!’라는 문구가 많은 사이클링 팬들 사이에서 유행했던 적이 있었다. 너무나 지쳐 꼼짝달싹하지 않으려는 자신의 다리를 향해 ‘닥치고 움직여’라고 외치는 호전적인 투사의 이미지를 떠올리면 정확하다.








그러나 아무리 뛰어난 레이서라도 세월을 거스를 수는 없는 법이다. 2014 USA 프로챌린지는 옌스 보이트의 마지막 투어레이스였고, 올해 9월 그는 은퇴를 결정한다. 그러나 팬들의 축하와 꽃다발을 받으며 쓸쓸히 퇴장하는 모습은 그에게 어울리지 않는다. 옌스는 마지막 순간까지 그의 온 몸을 불사르며 달리는 모습을 보여주기로 결정했다. 바로 아워 레코드 도전이다.

스프린트를 위한 폭발적인 힘을 내는 근육보다도, 까마득한 산길을 오르면서도 끊임없이 산소를 펌프질해 넣을 강한 심장과 폐보다도 중요한 것은 정신력이다. 1시간동안 고통스러운 전력질주를 하면서도 쉬지 않고 자신을 채찍질 하며 달릴 수 있는 남자, 옌스 보이트만큼 어울리는 이가 또 있을까?



옌스의 도전을 위한 무기, 트렉 아워 레코드 스피드 컨셉트






옌스 보이트의 도전을 위해 그의 소속팀인 트렉 팩토리 레이싱과 트렉 바이시클은 특별한 자전거를 준비했다. ‘아워 레코드 스피드 컨셉트(Hour Record Speed Concept)’라 이름 붙여진 이 모델은 공기저항을 조금이라도 줄여 기록향상에 도움을 주기위한 자전거다.








이름에서 쉽게 알 수 있듯, 이 자전거는 트렉의 타임트라이얼/트라이애슬론용 로드바이크인 스피드 컨셉트를 베이스로 개발된 트랙 자전거다. 실내 트랙을 달리는 아워 레코드용 자전거에 브레이크는 필요 없다. 불필요한 부품을 모두 제거하고, 공기역학과 효율적인 주행을 위해 다듬어졌다.







UCI(국제사이클연맹)은 선수의 실력이 아닌, 자전거의 성능에 의해 기록이 좌우되는 것을 막기 위해 아워 레코드 기록주행용 자전거의 디자인에 관한 엄격한 규정을 갖고 있다. UCI가 정해놓은 제약 안에서 최대한 공기저항을 줄인 자전거, 이것이 아워 레코드 스피드 컨셉트다.








도로용인 스피드 컨셉트 모델은 차체 후방에 다용도 수납함을 장착했는데, 사실 이는 물품 휴대보다도 자전거의 공기역학적 특성을 다듬기 위해 장착한 ‘날개’나 다름없다. 하지만 아워 레코드 스피드 컨셉트는 UCI의 규정을 만족하기위해 외부 부착물을 모두 제거했고, 뒷바퀴의 앞쪽을 감싸는 삼각형 페어링도 제거했다.











앞에서 보아 납작한 윙 타입의 핸들은 주행 중 공기저항을 줄이기 위함이다. 중앙에 장착된 뿔 모양의 TT바는 고속을 유지하기위해 앞으로 숙인 자세를 취할 수 있도록 해준다. 프레임은 트렉 팩토리 레이싱의 팀컬러인 화이트/블랙 투톤으로 도색되었고, 디스크 휠은 마치 시계의 다이얼처럼 디자인되었다. 그야말로 아워 레코드에 도전하는 자전거 그 자체다.












자전거의 탑튜브와 다운튜브에는 옌스 보이트를 응원하는 문구가 적혀있다. 원문을 그대로 옮기기에는 그 문구가 다소 거칠지만, ‘1시간이면 옌스 보이트는 달까지 갔다가 돌아올 수 있다’는 내용이 재미있다. 이는 사이클링 팬들 사이에서 유행하던 ‘옌스 보이트 농담’ 중 한 구절이다.

옌스 보이트에 관한 농담에는 여러 가지 시리즈가 있다. 이를테면,
- 옌스 보이트가 지구 위를 달리는 것이 아니라, 지구가 옌스 보이트가 달리는 반대 방향으로 돈다.
- 옌스 보이트는 오랜 기간 사이클리스트로 활동하고 있는데, 이것은 나이가 옌스를 따라잡지 못하기 때문이다.
- 옌스 보이트의 업힐용 스프라켓의 톱니 수는 11-11-11-11-11-11-11-11-11-12T의 고속기어 뿐이다.
- 투르 드 프랑스 첫 출전에서 옌스는 경기 첫 날 파리에 도착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몰랐었다. 그는 스테이지 2에 참가하기 위해 3350km 정도를 되돌아와야 했다.



아워 레코드, 위대한 사이클리스트의 기록에 도전하다

옌스 보이트 이전에도 많은 선수들이 아워 레코드에 도전했다. 1879년 프랭크 도드에 의해 세워진 첫 아워 레코드의 기록은 26.508km, 1972년 에디 메르크스의 아워 레코드는 49.431km였다. 에디 메르크스의 기록은 오랫동안 깨지지 않고 남아있었다. 사실 에디 메르크스보다 더 빨리 달린 이들도 있었지만, 공기저항을 줄이기 위한 특별한 자전거를 사용해 세운 기록들이었기 때문에 이러한 기록들은 UCI의 공식 아워 레코드는 인정받지 못한다.







에디 메르크스의 아워레코드는 2000년 영국의 크리스 보드만에 의해 깨진다. 이때 크리스 보드만의 아워레코드는 49.441km로 에디 메르크스의 기록을 근소하게 앞섰다. 보드만의 아워레코드는 2005년 온드레 소센카(Ondrej Sosenka)가 49.700km를 기록함으로서 다시 갱신된다.








9월 19일, 약 1600여명의 관중이 스위스 벨로드롬을 찾았다. 옌스 보이트의 마지막 주행을 보기위해, 그리고 새로운 월드 아워 레코드가 수립될지도 모르는 순간을 보기위해서다. 아워레코드는 과거의 위대한 사이클리스트들이 세운 기록에 대한 세월을 초월한 도전이다. 옌스 보이트의 아워 레코드 도전은 곧 그가 전설적인 사이클리스트의 반열에 들 자격이 있는지 시험받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몸을 풀고, 자전거를 타고 트랙에 뛰어들어 1시간동안 미친 듯 달리기만 하는 것만으로 새로운 전설이 만들어지지는 않는다. 아워 레코드를 위해 옌스 보이트와 트렉 팩토리 레이싱 팀은 정밀한 전략을 짰다. 계산 결과 250m 트랙을 평균 17.7초에 한 바퀴 돌 수 있다면 50.84km의 기록으로 세계 아워 레코드 기록을 갱신할 수 있다는 결론을 냈다.

출발 직전, 옌스는 자전거의 안장에 앉아 심호흡을 하고 있었다. 출발 순간을 알리는 카운트다운 초시계의 숫자가 줄어든다. 출발 신호와 동시에 옌스는 속도를 내기 시작하고 트랙을 반 바퀴 돌았을 때는 이미 최고속도에 근접한 속도로 달리고 있었다.








벨로드롬을 달리는 레이서에게는 주변의 풍경과 소리가 잘 들리지 않는다고 한다. 그가 달리며 바라본 풍경이 어떤 것이었는지, 달리는 동안 그의 뇌리에 어떤 생각이 떠올랐는지, 관중들의 응원이 들렸는지는 오로지 옌스 보이트 본인만이 알 것이다.








위기의 순간도 있었다. 잠시 페이스가 처지는 순간도 있었다. 목표인 17.7초보다 느린 기록으로 달린 것이 14바퀴. 하지만 오히려 타임리미트가 가까워올수록 그의 주행은 안정을 찾았다. 아워 레코드 측정 후반인 50분이 넘어가는 시점에서도 17.2초대의 꾸준한 페이스를 유지하며 달렸다. 경기 초반 16초대 랩타임을 낸 5바퀴를 포함하여 옌스 보이트의 평균 랩타임은 17.7초를 상회했다.








옌스가 198바퀴를 돌았을 때, 관중들이 하나 둘 박수치기 시작했다. 199바퀴를 돌았을 때, 심판의 총성이 경기장을 울렸다. 49.750km를 주파하며 세계 아워 레코드 기록을 깬 것이다. 바로 그 순간부터 옌스는 도전자가 아닌 챔피언이 되었다. 그리고 남은 1분 30초 동안 그가 할 일은 ‘미래의 도전자’가 그의 기록을 깰 수 없도록 새로운 아워 레코드 신기록을 수립하는 것이었다.








시간을 알리는 시계의 숫자가 0이 되는 순간, 옌스 보이트의 도전이 끝났다. 토탈 랩 204바퀴, 평균 속도 51.11km/h, 총 주행거리 51.11km. 43세의 사이클리스트는 온몸을 불사르며 자신의 은퇴를 알리는 화려한 축포를 쏘았다.








그렇게 축제가 끝났다. 그의 뜨거운 질주를 다시 볼 수 없음에 아쉬워하는 이도, 마지막 순간까지 온 몸을 불사르며 달리는 그의 모습을 기억하겠노라 다짐하는 이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아마 앞으로도 옌스는 도전자의 삶을 살고 있지 않을까? 은퇴한 사이클리스트이자 여섯 아이의 아빠인 옌스의 새로운 도전을 다시 지켜보며 응원할 수 있기를 기대한다.
Good bye, Jens. See you aga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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