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이스용 자전거는 자동차보다 오히려 항공기와 닮은 부분이 많다. 빠른 속도를 유지하기 위해 공기저항을 극도로 줄이고, 가벼운 무게를 지니면서도 높은 강성을 유지하기 위해 고가의 첨단 소재를 아낌없이 사용한다.
자전거 프레임을 만드는 재료는 철, 알루미늄, 카본 등 다양하지만 그 중에서도 티타늄은 특별한 취급을 받는다. 티타늄은 가볍고 탄성이 뛰어나 자전거용으로 쓰기에 이상적인 재료 중 하나지만, 가공과 용접이 까다로워 숙련된 기술자의 손길을 통해서만 만들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장인의 섬세한 손길로 만들어진 고급 티타늄 자전거들은 여전히 그 가치와 희소성을 인정받는데, 그 중에서도 최고라 여겨지던 티타늄 프레임 메이커가 있었으니 바로 라이트스피드(Litespeed)다.
라이트스피드, 티타늄 스페셜리스트의 등장
라이트스피드는 미국 테네시 주의 작은 티타늄 공장에서 탄생했다. 이 공장은 린스키(Lynskey) 집안이 가업으로 운영하던 곳이었는데, 장남 데이비드 린스키는 육상선수로 활동하던 중 다리를 다쳐 재활치료를 위해 자전거를 타기로 결심한다.
라이트스피드 창립자 데이비드 린스키 하지만 인근 자전거 숍에 전시되어있던 어떤 자전거도 데이비드 린스키의 마음에는 들지 않았다. 차라리 자신의 손으로 자전거를 만들어 타기로 결심한 린스키는 공장에서 티타늄 튜브를 용접해 자전거를 만들기 시작하는데, 이것이 티타늄 자전거 명가 라이트스피드의 창세기다. 프로 사이클링 선수들도 대부분 스틸 소재의 자전거를 탔는데, 린스키의 티타늄 자전거는 이와 비교가 안 될 정도로 가벼운 무게를 자랑했다.
입소문을 타고 들어오는 티타늄 자전거의 주문은 점점 늘어나 주말에 짬짬이 만드는 정도로는 주문량을 생산량이 따라가지 못했고, 린스키 가족이 경영하던 회사는 본격적인 자전거 프레임 제조사로 거듭나게 된다. 라이트스피드라는 이름은 린스키 형제들이 그들의 자전거 브랜드 이름을 놓고 고민하던 중 ‘가볍고 빠른 자전거니까 라이트스피드가 좋겠다’는 아이디어에서 탄생한 것이다.
1993년 세계선수권에서 우승한 랜스 암스트롱 수많은 브랜드의 티타늄 프레임이 라이트스피드의 공방에서 태어났다. 비앙키(Bianchi)와 룩(Look), 데로자(DeRosa), 트렉(Trek)을 비롯한 여러 자전거 메이커가 라이트스피드가 만든 티타늄 프레임에 자사의 상표를 붙여 판매했다. 1993년 미국 모토롤라 팀의 기대주였던 랜스 암스트롱이 세계선수권대회에서 우승했을 때 탔던 에디 메르크스(Eddy Merckx) 티타늄 자전거도 라이트스피드의 작품이었다.
티타늄 에어로다이내믹스
라이트스피드 블레이드 (1995). 타임트라이얼 U.S. 내셔널챔피언 스티브 헤그가 블레이드를 타고 우승함으로서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다. 라이트스피드는 로드바이크에서 MTB에 이르는 다양한 자전거를 만들었지만, 그 중에서도 라이트스피드의 독보적인 실력을 보여준 모델이 있었으니 바로 공기역학적 디자인의 로드바이크 ‘블레이드’(Blade)다. 블레이드는 검 날을 뜻하는데, 자전거 프레임을 구성하는 튜브의 단면이 납작한 마름모꼴로 검을 닮았기에 붙여진 이름이다.
1990년대는 자전거에 공기역학적 디자인을 본격적으로 도입하여 ‘비행기를 닮은’ 자전거를 만들기 위해 여러 메이커가 경쟁하던 시기였다. 그런데 여러 메이커가 이런 자전거들을 알루미늄으로 만들었지만 무척 무거웠다. 하지만 티타늄은 가벼우면서도 튼튼한 자전거를 만들기에 최고의 소재였고, 라이트스피드는 4년간의 연구개발 끝에 1995년 블레이드를 선보인다.
라이트스피드 블레이드 (1997). 풍동 실험을 통해 매년 디자인이 조금씩 바뀌었다. 마름모 모양이었던 튜브의 단면이 유선형으로 다듬어지고, 전방에 쐐기 모양의 구조물이 더해진 것이 특징. 블레이드는 얼핏 보기에 무척 무거워 보이지만, 프레임을 구성하는 티타늄 튜브를 마치 깡통처럼 얇게 뽑아낸 덕에 가벼운 무게를 자랑했다. 프레임의 높은 강성이 요구되는 부분에는 당시의 기술로 가공이 무척 어려웠던 고가의 소재인 6AL/4V 티타늄(알루미늄 6%, 바나듐 4% 함유 티타늄 합금)을 사용했다는 점도 블레이드의 특징 중 하나다. 손으로 프레임을 두드리면 깡깡 울릴 정도로 얇은 소재로 만들어진 가벼운 자전거가 프로 사이클리스트의 강력한 페달링을 추진력으로 바꿔 바람을 가르고 달리는 모습은 사람들이 블레이드를 ‘가장 가볍고 빠른 자전거’로 기억하게 만들었다.
1999년 투르 드 프랑스 개인 타임트라이얼 2회 우승을 차지한 랜스 암스트롱. 랜스 암스트롱은 특별 주문한 라이트스피드 블레이드를 탔다. 스폰서십 관계로 트렉의 마킹이 되어있다. 1999년 미국의 프로사이클링 팀 USPS의 랜스 암스트롱은 투르 드 프랑스에서 개인종합 우승을 차지했고, 특히 타임트라이얼 레이스에서 독보적인 실력을 과시했다. 랜스 암스트롱은 미국의 자전거 회사 트렉의 후원을 받았는데, 그가 타고나온 타임트라이얼 자전거는 그동안 트렉이 내놓은 어떤 모델과도 닮지 않은 모델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사실 이 자전거는 랜스 암스트롱을 위해 라이트스피드가 특별 주문제작한 모델이었기 때문이다.
랜스 암스트롱이 탔던 자전거는 라이트스피드 블레이드를 타임트라이얼 레이스용으로 개량한 모델로, 원래 트라이애슬론용으로 개발된 오리지널 블레이드에는 26인치(650c) 휠이 장착되었지만, 랜스 암스트롱이 탔던 모델은 특별히 28인치(700c) 휠을 장착할 수 있게 커스텀 제작되었다. 또한 무게가 늘어나는 것을 감수하고서라도 공기저항을 최대한 줄이기 위해 마름모꼴 튜브로 프레임 앞 삼각 전체를 만들었으며, 시트튜브가 뒷바퀴 앞부분을 감싸는 형태를 하고 있다. 또 헤드튜브 앞쪽에 붙어있는 공기를 가르기 위한 쐐기모양의 구조물은 이 자전거가 블레이드임을 한 눈에 알 수 있게 해준다.
라이트스피드 블레이드 프레임 (2001). 쐐기꼴 구조물이 부착된 마지막 버전. 1990년대 중반부터 2000년대 초반까지, 라이트스피드는 세계 최정상급의 자전거를 만드는 메이커로 인정받았다. 하지만 2000년대 중반부터 가볍고 강할 뿐 아니라, 어떤 형태로든 자유로운 디자인의 자전거를 만들어낼 수 있는 카본소재(CFRP : 탄소섬유 강화 플라스틱) 자전거가 빠르게 보급되며 티타늄 자전거는 레이스 일선에서 물러나게 된다.
라이트스피드 블레이드 (2004). 1995년형 모델과 비교하면 700c 휠세트의 장착을 비롯한 많은 변화가 이루어진 것을 알 수 있다. 현재의 라이트스피드는 여전히 강력한 네임 밸류를 지닌 티타늄 자전거 메이커일 뿐 아니라 카본소재의 자전거를 생산하며, 트라이애슬론 바이크를 중심으로 높은 인지도를 보이고 있다. 한편 라이트스피드를 창립한 린스키 패밀리는 2005년 아메리칸 바이시클 그룹에 회사를 매각 후, 장남인 데이비드 린스키를 중심으로 린스키 퍼포먼스(Lynskey Performance)라는 새로운 브랜드로 예술적 감성과 퍼포먼스를 추구하는 개성 있는 핸드빌트 티타늄 자전거들을 만들고 있다.
라이트스피드 C1R (2014) 카본 에어로 로드바이크.
린스키 퍼포먼스 R450 로드바이크 프레임. 라이트스피드 블레이드는 현재 더 이상 생산되지 않으며, 블레이드와 같은 에어로다이내믹 티타늄 자전거를 앞으로 다시는 찾아보기 어려울 것이다. 하지만 블레이드가 비록 짧은 기간이나마 세계 정상에 올랐던, 그 어떤 자전거와도 다른 독특한 모델이었음을 여전히 많은 사이클링 팬들이 기억하고 있다.
글
라이드매거진 sjlee@ridema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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