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의 자전거 메이커 중에는 100년 이상의 오랜 전통을 가진 곳들이 있다. 사실 자전거의 역사를 이야기하는 것보다, 오랜 역사를 가진 자전거 브랜드의 탄생이나 그 자전거를 탔던 명선수들에 대한 재미난 일화를 찾아보는 것이 더 재미있을지도 모른다.
자전거 마니아라면 언젠가 꼭 갖고 싶은 명품 자전거 중 이탈리아 브랜드 제품 하나쯤은 있지 않을까? 사실 자전거의 본고장은 유럽이고, 특히 이탈리아의 공방에서는 지금까지도 명기라 인정받는 자전거들이 많이 탄생했다. 그 중에는 이제 역사 속으로 사라진 것들도 있지만, 변화에 적응하고 살아남아 여전히 그 이름을 이어나가고 있는 브랜드도 있다. 108년의 역사를 가진 윌리어 트리에스티나(Wilier Triestina)는 이런 정통 이탈리아 자전거를 대표하는 브랜드 중 하나다.
이탈리아인의 애국심을 담은 브랜드
윌리어 트리에스티나는 1906년에 창립된 자전거 메이커로, 107년의 전통을 자랑한다. 창립 당시의 이름은 윌리어였으며, 창립자 달 몰린이 베니스에서 6마일 정도 떨어진 몬테그라파에 자전거 공장을 세우면서 걸음을 내딛었다.
이탈리아의 자전거 브랜드 중에는 피나렐로(Pinarello)나 비앙키(Bianchi), 데로자(DeRosa)처럼 창립자의 이름을 브랜드명으로 사용하는 곳들이 많다. 그러나 윌리어는 사람의 이름이 아닌 ‘이탈리아 만세! 자유와 구원을(Viva l'Italia leberata e redenta)’이라는 구호를 짧게 줄인 것이다. 만세를 뜻하는 이탈리아어 ’Viva'를 짧게 줄여 ‘VV’라 쓴 것이 윌리어라는 이름의 첫 글자가 되었다. 윌리어 창립 당시의 이탈리아는 수많은 내전 끝에 통일 왕국이 된지 50년이 채 안 된 약소국이었다. 윌리어라는 이름에는 이탈리아인의 애국심이 담겨있다.
1915년 제1차 세계대전의 발발은 비극이었지만, 한편으로 윌리어가 크게 성장하는 계기가 된다. 당시 말과 자전거는 지금의 자동차와 모터사이클에 비견될 만큼 산업적, 군사적으로 중요한 운송수단이었고, 윌리어는 전쟁기간동안 자전거를 대량생산하면서 회사의 규모를 크게 키우게 된다.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면서 뚜르 드 프랑스나 지로 디 이탈리아 같은 자전거 레이스는 모두 중단되었다. 윌리어 또한 이 기간 동안 많은 어려움을 겪었지만, 다행스럽게도 세계대전으로 인한 윌리어의 피해는 크지 않았고, 윌리어는 금방 과거의 명성을 회복했다. 1940년대 후반, 윌리어의 직원 수는 300명이 넘었고 하루 200대 이상의 자전거를 생산했다고 한다.
사이클링 팀 ‘윌리어 트리에스티나’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직후, 당시 이탈리아에서 자전거 로드레이스는 현재의 모터스포츠 이상으로 큰 인기를 얻었다. 지금도 사이클링 역사에서 전설적인 선수라 추앙받는 두 선수, ‘지노 바탈리’와 라이벌 ‘파우스토 코피’의 치열한 경쟁은 이탈리아 전체를 뜨겁게 달아오르게 했다. 이러한 레이스의 인기를 눈여겨본 윌리어는 프로 사이클링 팀을 창단하게 된다.
윌리어의 창립자 달 몰린은 당시 지노 바탈리, 파우스토 코피와 경쟁하던 또 다른 베테랑 선수 지오르다노 코투르를 후원하기로 결정한다. 지오르다노 코투르는 이탈리아 최대의 레이스인 지로 디탈리아(Giro d'Italia)에서 3회 우승한 경력이 있는 베테랑이었고, 윌리어는 그를 리더로 한 프로 사이클링 팀을 출범시키는데, 이 팀이 바로 ‘윌리어 트리에스티나(Wilier Triestina)’다.
‘윌리어 트리에스티나’라는 팀의 이름은 당시 팀이 출범했던 아드리아 해 연안의 도시 트리에스테에서 가져온 것이다. 그런데 당시 트리에스테는 이탈리아와 공산주의 국가인 슬로베니아가 반씩 차지하고 있었고, 시민들은 자유진영과 공산진영으로 대립하고 있었다. 시민들끼리 서로를 미워하고 대립하는 분위기 속에 긴장감은 점점 높아졌고, 유혈 폭동이 일어나기도 했다.
하지만 윌리어 트리에스티나 팀이 서로 대립하던 자유, 공산진영 시민들을 하나로 묶었다. 지로 디탈리아에서 좋은 성적을 거둔 윌리어는 트리에스테에서 개선을 축하하는 퍼레이드를 열었고, 온 도시는 축제 분위기에 휩싸였다. 윌리어 트리에스티나 팀은 이탈리아인의 애국심을 상징하는 아이콘이 되었고, 1945년 윌리어는 회사명 또한 윌리어 트리에스티나로 바꾸게 된다.
윌리어 트리에스티나 팀은 1947년 촉망받던 젊은 사이클리스트 피오렌조 마니 (Fiorenzo Magni)를 영입한다. 마니는 이듬해인 1948년 지로 디 이탈리아에서 파우스토 코피, 지노 바탈리 등과 치열한 경쟁 끝에 결국 우승자의 유니폼인 마리아 로자를 입으며 챔피언으로서 윌리어 트리에스티나의 이름을 널리 알린다. 마니는 1950년까지 윌리어 트리에스티나 팀에서 활약했으며, 지로 이외에도 투어 오브 플랜더스에서 2회의 우승을 차지했다.
당시 윌리어 트리에스티나는 프레임 전체를 구리로 도금하는 독특한 오렌지 빛의 자전거를 생산했다. 이 태양처럼 붉게 빛나는 프레임은 ‘라마타(ramata)'라는 이름으로 불렸고, 곧 윌리어 트리에스티나의 상징으로 자리 잡는다.
그러나 윌리어 트리에스티나의 영광의 날은 길지 않았다. 1950년대 이후 이탈리아는 빠르게 ‘스쿠터’와 ‘코터사이클’로 상징되는 공업화의 길을 걷는다. ‘기적의 경제 부흥’이 찾아왔지만, 사이클링의 인기는 점점 식어갔고 결국 윌리어 트리에스티나는 1952년을 마지막으로 팀을 해산하게 된다.
프로 레이스에서 인정받다
하지만 1980년대, ‘사이클링의 황금시대’를 맞이하며 윌리어 트리에스티나는 다시 레이스로 복귀한다. 메캅-훈베드, 셀레 산 마르코, 마레노, 슈퍼메르카티 브리안졸리 팀 등이 윌리어 트리에스티나의 자전거를 탔다. 1985년과 1986년에는 클라우디오 코르티가 윌리어의 부활을 알리는 구리빛 ‘라마타’ 프레임의 로드바이크를 타고 이탈리아 챔피언의 자리에 올랐다.
1990년대 초반 윌리어 트리에스티나는 잠시 레이스를 떠났지만 1995년 브레스치알랏 팀을 통해 복귀하여 지로 디 토스카나 우승, 지로 디 이탈리아 15스테이지 우승을 차지하며 건재함을 과시했다. 1997년은 특히 기념비적인 해였다. 선수생활이 불가능할 정도의 부상과 장애를 극복하고 돌아온 마르코 판타니를 중심으로 한 신생 팀 메르카토네-우노는 윌리어 트리에스티나를 타고 레이스에 데뷔했다.
마르코 판타니는 천부적인 재능을 가진 슈퍼 클라이머로 유명했지만, 자전거에 대해서도 까다롭기로 유명했다. 판타니는 끊임없이 더 강성이 높으면서도 가벼운 자전거를 만들어 줄 것을 요구했고, 이를 개발하는 것은 윌리어 트리에스티나의 몫이었다. 그리고 마르코 판타니는 1997년 투르 드 프랑스(Tour de France)에서 종합 순위 3위에 올랐다. 투르 드 프랑스는 약 3주간에 걸쳐 프랑스를 일주하는 세계 최정상의 자전거 경주다.
게다가 마르코 판타니는 사고 후유증으로 한 쪽 다리가 3cm나 짧아진 장애를 극복하고 거둔 성과였으며, 알프스를 비롯한 험준한 산악에서의 승부 결과만 보았을 때 누구도 마르코 판타니를 위협하지 못했다.
특히 투르 드 프랑스의 코스 중 ‘랄프 듀에즈(L'Alpe d'huez)’는 악몽 같은 난이도를 자랑하는 산악 코스다. 그리고 마르코 판타니는 평균 경사도 7.9%, 고도 1860m, 오르막 22km의 이 산길을 37분 35초 만에 올랐는데, 아직도 이 기록을 깰 선수가 나타나지 않고 있다.
그리고 마르코 판타니가 랄프 듀에즈를 오를 때 탔던 자전거는 다름 아닌 윌리어 트리에스티나였다. 윌리어 트리에스티나는 당시의 기술로서는 한계에 가까운 경량화를 이룬 최신형 레이싱바이크인 ‘랄프 듀에즈’와 ‘모티롤로’를 개발했고 이는 마르코 판타니의 산악 스테이지 우승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윌리어 K2. 최초의 풀 카본 모노코크 프레임을 사용한 레이스바이크 마르코 판타니는 1998년부터 비앙키 자전거를 탔지만, 2002년부터 다시 윌리어 트리에스티나의 자전거를 탔다. 비록 이때의 마르코 판타니는 예전과 같은 전성기의 모습을 보여주지 못했지만, 그를 위한 첨단 레이스바이크 개발에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2009 UCI 월드챔피언십에서 우승한 이탈리아인 레이서 알레산드로 발란의 레인보우 저지 또한 윌리어 트리에스티나는 세계 최초로 비대칭형 프레임을 레이스에 투입한 자전거 메이커이기도 하며, 이러한 최신 레이스바이크 개발에 대한 의지와 노력은 람프레와 게롤슈타이너, 코피디스를 비롯한 여러 팀, 발란과 쿠네고, 페타키를 비롯한 명선수들을 통해 값진 승리로 보답 받았다.
윌리어 센토 우노. 알레산드로 발란이 UCI 월드챔피언십 우승 당시에 탔던 로드바이크 현재 이탈리아의 많은 자전거 메이커가 점차 신기술 개발 경쟁력의 부족으로 과거의 명성을 잃어가고 있다. 그러나 윌리어 트리에스티나는 여전히 최신 기술을 개발하고, 세계 자전거 시장에서 인정받으며 성장을 이어나가고 있는 몇 안 되는 정통 이탈리아 자전거 메이커 중 하나다. 108년이라는 오랜 전통은 끊임없는 혁신이 있었기에 지금까지 이어져 내려올 수 있었고, 이는 앞으로도 계속 될 것이다.
글 장낙규 기자
제공 라이드매거진(ridema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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