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터사이클을 타지 않는 일반인들에게 CBR이라는 이름을 아느냐고 물어보면 많은 사람들이 영화 ‘비트’에 나왔던 모터사이클이 아니냐고 대답하곤 한다. 물론 영화 비트가 나오기 이전부터 모터사이클을 타왔던 라이더들에게 혼다의 CBR은 명차의 반열에 올라선 꽤나 유명한 모델명이었다. 영화 비트 속에 등장한 혼다 CBR600F는 일제 모터사이클이 흔치 않던 시절 라이더가 아닌 남자들에게 모터사이클에 대한 환상을 심어주기에 충분했다. 특히 정우성이 양 팔을 벌리고 바람을 맞으며 다리 위를 달리는 장면은 많은 젊은이들의 가슴 속에 하나의 상징적인 의미로 남아 지금까지도 CBR을 얘기할 때 회자되는 이미지이기도 하다.
CBR은 FireBlade(파이어블레이드)라는 닉네임으로 오랜 시간 숙성되어 온 혼다의 슈퍼스포츠 대표 기종이자 기술력을 증명하는 간판모델이다. 레이스를 위해 태어난 CBR은 공도용 모터사이클로써 일반인도 누구나 쉽게 슈퍼스포츠 모터사이클의 잠재된 폭발적 성능을 만끽할 수 있도록 고안된 것이 특징이다. 그러한 친절함과 독보적인 존재감이 어우러져 첫 탄생인 1992년부터 2013년 현재까지 꾸준한 사랑을 받아왔다.
1세대 CBR900RR - 1992
CBR900RR의 탄생비화는 무척 심플하다. 혼다는 세계적인 규모의 레이스인 스즈카 8시간 내구 로드레이스에서 승승장구 하던 RVF750을 대체할 고성능 모터사이클을 개발해야 했다. RVF750보다 한층 기술적으로 진보한 메커니즘을 추구한 끝에 1992년에 첫 CBR900RR이 데뷔했다. 특히 혼다는 경쟁사의 플래그십 스포츠바이크가 가진 파워 그 이상의 성능을 내기 위해 병렬 4기통으로 배치한 750cc엔진의 용적을 늘려 893cc의 배기량으로 재설계했다.
우수한 파워를 효과적으로 끌어내기 위한 필수 요소는 무엇보다도 초 경량화였다. 초대 CBR인 1세대의 건조중량은 고작 185kg에 그쳤다. 휠베이스는 1,405mm로 극단적으로 줄여 선회능력을 보장했으며, 바디는 프로토타입(초기 연구용 모델)과 거의 동일한 상태 그대로 양산 판매 할 수 있도록 했다. 완벽한 오리지널 슈퍼스포츠의 구성을 기본으로, 아마추어 라이더라도 파워를 마음대로 다룰 수 있는 획기적인 컨트롤 특성을 결합시켰다. 슈퍼스포츠는 다루기 어렵고 거칠다는 관념을 완전히 깨부순 역작이라 할 수 있다.
2세대 CBR900RR - 1994
2년 후인 1994년, 2세대 CBR900RR은 보다 뛰어난 엔진 효율과 노면 추종성에 승부를 걸었다. 지금은 상식적인 장비로 자리 잡은 풀 어저스터블 포크, 즉 운전자에 맞게 조절 가능한 프론트 포크를 장착한 것이다. 이러한 특징들로 인해 2세대 모델은 지금까지 등장한 적 없었던 부드럽고도 날카로운 궁극의 핸들링 머신으로 많은 사람들에게 어필할 수 있었다.
그것뿐 아니다. 모든 파츠들을 새롭게 다듬어 더욱 가볍게 제작했다. 이를테면 어퍼 카울 스테이가 스틸에서 알루미늄으로 바뀌고 실린더 헤드 커버는 알루미늄에서 마그네슘으로 바뀌는 등 가능한 한 모든 부품을 다시 디자인했다. 전체적인 페어링의 스타일도 바뀌었다. 독립된 듀얼 라이트와 불규칙한 형태로 반짝이는 멀티-리플렉터 라이트는 일명 ‘호랑이 눈’으로 잘 알려졌고, 페어링 곳곳의 면과 라인이 더욱 섬세하게 다듬어졌다.
3세대 CBR900RR - 1996
세 번째 CBR은 뼈대라고 할 수 있는 트윈 스파 프레임에 변화가 컸다. 프레임의 기본 형태는 그대로 유지된 가운데 무게는 더 가볍게, 강성은 더 높게 개선됐다. 또한 연료탱크 디자인이 바뀌며 라이딩 포지션에도 변화가 있었는데 이는 결과적으로 좀 더 날카로운 핸들링 특성으로 개선하는 계기가 됐다. 외관상 변화는 에어로다이내믹스(공기역학)를 보완한 새로운 리어 카울의 적용이 두드러진다.
엔진은 실린더 구경이 1mm 증가해 71mm*58mm(보어*스트로크)가 되었으며, 배기량이 893cc에서 918cc로 증가해 출력이 한층 높아졌다. 또한 카뷰레터 내의 새로운 스로틀 센서로 인해 129마력을 손쉽게 사용할 수 있도록 구성했다. 배기 시스템은 새로운 스테인리스 스틸 파이프를 채용해 최종 건조 중량은 183kg으로 1세대 모델과 비교해 1kg 감량했다.
4세대 CBR900RR - 1998
초기 모델 연구 당시부터 CBR시리즈는 가능한 한 가벼운 모터사이클로 손쉬운 조종성을 갖도록 디자인 했다. 1998년 모델은 더욱 숙성된 가공 기술을 동원해 바로 이전 모델 기준으로 전체의 약 80%의 부품을 재설계했다. CBR 연구 개발 팀은 볼트 하나 마저도 경량화 디자인을 추구하는 집요함을 보였고, 그 결과 기존보다 5kg을 감량한 180kg의 건조중량을 기록했다.
대폭 가벼워진 중량 덕에 핸들링 특성 등 전반적인 퍼포먼스가 더욱 강화됐다. 또한 강성이 향상된 스윙암 피봇, 새로운 마름모 형태의 단면 스윙암, 헤드파이프의 폭 변화를 비롯한 여러 가지 새로운 디자인 요소들이 결합되어 고속안정성을 한층 더 업그레이드 했다. 새로운 엔진 세팅으로 최대출력은 2마력이 증가한 130마력을 마크했으며, 런칭 당시 많은 이들이 증가된 출력과 차체 완성도 등 전반적인 퍼포먼스를 칭송하기에 이르렀다.
5세대 CBR900RR(CBR929RR) - 2000
이번 세대에서 CBR에 완전히 새로운 엔진이 탑재되었다. CBR 시리즈 중 처음으로 전자식 연료분사 시스템(PGM-FI : Programmed Fuel Injection)을 탑재했고, 배기량은 929cc로 커졌으며, 이로 인해 최대출력이 148마력으로 크게 증가했다. 바디와 프레임도 모두 새롭게 디자인되었다. 독립된 U형 플레이트 스윙암이 장착된 세미-피봇리스 프레임(프레임과 스윙암이 직접 연결되지 않는 구조)을 완성한 것이다. 이 메커니즘은 부드러운 승차감을 유지하는 동시에 코너링 시 리어 섹션의 최적화된 유연성을 제공하는 장점이 있다. 그 결과 새로운 감각의 코너링 안정성과 극도로 민첩한 핸들링이 결합된 슈퍼바이크로 다시 한 번 자리매김하게 됐다. 이 기술은 동사의 V트윈 스포츠인 VTR시리즈에도 적용되어 호평을 받았다.
5세대 CBR은 과거 등장한 어떤 슈퍼스포츠보다 인간 친화력이 강하면서도 높은 한계치를 가진 모델이었다. 더욱이 CBR900RR 시리즈가 가진 경량 바이크의 정체성을 이어받아 리터 클래스 모터사이클로 이례적인 초경량 170kg을 달성하는 데 성공했다. 이렇듯 초경량 차체를 설계하기 위해 배기파이프와 머플러 일부를 티타늄으로 구성하는 등의 아낌없는 노력이 투여됐다.
6세대 CBR900RR(CBR954RR) - 2002
6세대는 기존의 CBR900RR이라는 이름을 가진 시리즈로써는 마지막 모델이다. 2002년 모델은 배기량이 954cc로 늘어났고 더불어 최대출력도 150.9마력으로 높아졌다. 피스톤 직경은 74mm에서 75mm로 증가했지만 피스톤과 피스톤 핀의 무게를 대폭 줄여 배기량 증가로 인한 과도한 진동 등 엔진으로부터 전달되는 피로를 예방했다. 크랭크샤프트와 크랭크케이스는 엔진의 크기를 최대한 줄이고 부품끼리의 마찰을 줄이도록 재설계되었고, 그 결과 스로틀 응답성이 크게 향상됐다.
6세대는 진보된 경량화 디자인이 적용되어 공차중량이 불과 168kg에 그친다. 최대한 경량화를 감행했던 5세대 모델보다도 2kg 더 가볍다. 당시 타사의 어떠한 모델보다도 강력한 출력을 제공했을 뿐 아니라, 2002년 모델은 가장 가벼운 슈퍼 스포츠바이크라는 기본 개념에 특히 충실했다. 뛰어난 핸들링과 컨트롤이 쉬운 보디사이즈로, 2002 CBR900RR은 1세대 모델의 가장 우수한 부분을 물려받아 극한으로 코너링 성능을 끌어올렸다는 찬사를 받았다.
7세대 CBR1000RR - 2004
7세대 모델에는 특징적인 유닛 프로 링크 리어 서스펜션과 센터-업 배기시스템 등 레이스를 통해 개발된 다양한 기술이 적용됐다. 슈퍼바이크 월드챔피언십과 다양한 레이스 참가를 고려해 디자인되었고, 완전히 새로운 신형 998cc 엔진이 탑재됐다.
이 엔진은 실린더 당 2개의 독립된 연료분사기를 가진 이중 연료분사(Programmed Dual Sequential Fuel Injection : PGM-DSFI)시스템을 탑재했다. 이 시스템은 3000rpm 이상에서 스로틀이 25% 이상 개방되었을 경우 두 번째 인젝터가 작동해 더욱 높은 출력을 내도록 되어 있다. 다이렉트 에어 인덕션 시스템은 엔진의 우수한 출력 특성과 중간-고속 RPM 영역에서의 빠른 스로틀 반응을 낼 수 있도록 돕는다. 스트리트 지향적이었던 CBR의 성격을 조금 더 트랙에 어울리는 머신으로 변모시킨 모델이다.
8세대 CBR1000RR - 2006
8세대 모델은 이전 모델의 기본 골격은 그대로 유지하되 여러 부분에서 세밀한 업그레이드가 감행됐다. 엔진의 스트레이트식 실린더 헤드 흡기 포트와 대형 배기 포트가 적용되었다. 형태와 타이밍이 조절되는 밸브를 적용해 연소 및 흡기, 배기효율을 높여 저-중속 영역에서 강한 토크를 가진 엔진으로 진보했다. 프론트 디스크 로터 직경은 310mm에서 320mm로 커졌으며, 두께는 5mm에서 4.5mm로 조절해 한계를 높였다. 리어 브레이크는 무게가 더 가벼워진 콤팩트 캘리퍼를 적용했다. 이러한 작은 변화를 통해 브레이킹 퍼포먼스를 높이는 데 많은 노력을 기했다. 그 외 큰 변화 없이 부족한 부분에 대한 완성도를 높인 것이 8세대 모델의 특징이다.
9세대 CBR1000RR - 2008
9세대 CBR1000RR은 RC212V에서 비롯된 백 토크 리미터 시스템과 슬리퍼 클러치가 장착되어 클러치의 하중을 획기적으로 줄였다. 부드러움과 날카로움을 겸비한 CBR 시리즈의 전통적인 핸들링 특성 또한 한층 강화됐다. 경량 휠과 모노블록 브레이크 캘리퍼, 더욱 짧아진 언더슬렁(엔진 하부로 사일렌서가 위치한 타입) 머플러가 장착되었다. 바이크의 무게중심에서 먼 상단 카울의 면적을 줄였고, 시트 카울은 보다 콤팩트해졌다. 무엇보다도 슈퍼스포츠 설계의 기본인 질량집중화에 많은 공을 들인 모델이다.
10세대 CBR1000RR - 2009
10세대 CBR1000RR에는 슈퍼 스포츠바이크로는 이례적으로 전자제어식 통합 ABS가 장착되었다. 10세대 모델의 브레이크-바이-와이어 시스템은 라이더의 브레이크 레버와 페달의 압력을 전자신호로 받아들여 이를 유압으로 변환하며, 브레이크와 파워유닛간의 커뮤니케이션을 통해 제동력을 조절한다. 컴퓨터가 제공하는 정확한 프론트-리어 제동력 분배와 ABS 조작을 통해, 슈퍼 스포츠바이크가 반드시 가져야 하는 섬세한 제동력 컨트롤에 간섭하는 일 없이 ABS를 적용하는 데 성공했다.
경량의 보디, 짧은 휠베이스와 기민한 린 특성을 위한 높은 무게중심 설정은 자칫 가속과 감속 시 쓸데없는 움직임의 원인이 될 수 있다. 따라서 서스펜션 아래의 중량, 즉 언스프렁 웨이트(Unsprung weight)를 최대한 줄이는 것이 가장 좋은 해결책인데, 10세대 CBR1000RR은 그런 점에 주안점을 두고 업그레이드 콘셉트를 유지했다.
11세대 CBR1000RR – 2010
11세대 CBR1000RR은 라이더에게 보다 스포티한 라이딩의 즐거움을 제공하기 위해 모든 영역에서 세련되게 다듬어졌다. 6단 톱기어의 부드러워진 토크 변화, ACG 플라이휠 직경의 증가, 크랭크샤프트 플라이 휠 결합부 강성 증가 등 작은 노력들이 모인 결과 크랭크샤프트와 관련 부품들의 관성질량이 증가했고 스로틀 조종성은 더욱 높아졌다. 또한 이러한 영향으로 차체 중량이 늘어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라디에이터 팬 모터 크기를 줄이고 배기파이프 플렌지의 두께를 줄였으며, 엔진헤드 실링 볼트는 알루미늄으로 교체했다. 이러한 미세한 변화들이 이미 한계까지 진화한 엔진의 완성도를 한 차원 더 높여주었다.
12세대 CBR1000RR - 2012
CBR시리즈 20주년을 기념하는 2012 CBR1000RR은 스트리트 스포츠바이크에 반드시 필요한 편안한 핸들링에 초점을 맞추어 디자인되었다. 특히 핸들링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 서스펜션이 모두 새로운 구조로 바뀌었다. 뒤쪽에 적용된 밸런스-프리 리어 쿠션은, 서스펜션의 실린더 내 밸브가 없는 피스톤 슬라이드가 삽입된다. 또한 독특하게 설계된 이중구조 피스톤 구조로 내부의 분리된 영역을 통해 오일이 드나들며 감쇄력을 발생시킨다.
프론트에는 넓은 압력 분포영역으로 부드러운 감쇄력을 만들어내는 빅 피스톤 포크(BPF)를 채용했다. 엔진 영역에서는 연료분사 세팅을 수정했다. 스로틀이 완전히 닫힌 상태에서 재차 개도할 시 섬세한 컨트롤 특성을 갖도록 개선했고, 이로 하여금 라이더는 보다 편안하고 안정적으로 마지막 파워 영역까지 모두 사용할 수 있도록 했다.
CBR Fireblade는 올해로 21년의 역사를 가진 슈퍼스포츠 베스트셀러다. 한 때 모터사이클계에서 CBR은 그야말로 독보적이었지만, 지금은 혼다의 CBR외에도 다양하고 특색있는 슈퍼스포츠들이 개성을 어필하며 소비자의 욕구를 채워주고 있다.
고출력, 초경량화가 상식이 된 지금, Ultimate Handling Machine 이라는 슬로건으로 시작한 1992년 CBR의 의미를 되새길 필요가 있다. CBR은 어느 때나 마찬가지로 ‘인간이 컨트롤할 수 있는 고성능 머신‘을 목표로 타 브랜드에는 없는 인간 친화적 슈퍼스포츠로 입지를 굳건히 유지해야 한다.
그로써 사람을 위한 모터사이클을 개발하는 혼다의 기업 정신을 견인하는 것은 물론, 희열 넘치는 모터스포츠를 남의 일로만 여겼던 아마추어 신규 라이더들이 이 세계로 유입될 수 있기 때문이다. 역사를 계승하는 혼다의 노력이 전 세계 모터스포츠 시장에 긍정적인 영향을 끼칠 수 있을지 기대가 크다.
제공 : 임성진 기자 / 라이드매거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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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드매거진 sjlee@ridema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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