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부분의 자동차는 길을 달리도록 설계되었다. 다시 말해 길이 아닌 곳을 달리도록 설계되지는 않았다. 그래서 때로는 길이 아닌 곳을 달리면서 자동차의 성능을 과시하고, 그 성능이 일반 도로에서도 발휘될 것이라 강조한다. 아마 그 가장 성공적인 사례를 든다면 과거 아우디가 콰트로 승용차로 스키 점프대를 거슬러 올라가는 광고를 촬영한 것이 아닐까?

아우디 콰트로 이후 여러 자동차 메이커가 비슷한 시도를 통해 성능을 과시했다. 스바루도 과거 국내에서 차량을 판매했을 무렵, 홍보의 일환으로 스키장의 눈 덮인 슬로프를 거슬러 오르며 주행 시연을 했던 적이 있었다. 사실 여러 자동차 메이커가 이와 비슷한 도전 아닌 도전을 하다 보니, 이제는 별로 대단하거나 특별하다는 느낌이 들지 않을 수도 있다. 

그래서 스바루는 방법을 바꿨다. 과거 임프레자라는 이름으로 랠리를 주름잡았던 모델 ‘WRX STI’의 성능을 과시하기 위해 스키장이나 점프대를 오르는 것이 아닌, 봅슬레이 코스를 달려 내려오기로 했다.

상시 사륜구동, 박서 엔진의 낮은 무게중심으로 어떤 상황에서도 뛰어난 컨트롤을 자랑한다는 메이커다. 좁은 눈길의 고속주행이라면, 그 성능을 충분히 강조할 수 있으리라는 계산이 깔려있다.

오르막이 아닌, 내리막길을 따라 내려오기만 하면 되는 것이 그리 대수냐 생각할지도 모르지만, 문제는 일반 도로가 아니라는 것. 스바루 WRX STI가 달릴 곳은 아스팔트가 아닌 눈, 그것도 매끄럽고 단단하게 다져진 봅슬레이 트랙이다. 스바루는 스위스 장크트모리츠의 올림픽 봅슬레이 트랙을 무대로 골랐다.

스바루 WRX STI의 바퀴를 떼고 스키나 썰매 날을 달지는 않았다. 대신 생모리츠를 올라 봅슬레이 트랙에 도착한 WRX STI의 신발은 400여 개의 텅스텐 카바이드 코어 스터드가 장착된 타이어로 교체되었다.

차량의 개조는 크게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차체의 여러 부위를 보강하고 무게를 줄였다. 스바루 WRX STI가 달릴 봅슬레이 트랙은 차가 달릴 수 있도록 폭을 2m 정도로 넓혔지만 여전히 좁다. 달리는 내내 자동차가 눈 벽에 스칠 것으로 예상되어 좌우로 돌출된 백미러는 제거하고, 대신 범퍼에는 완충재를 덧대었다. 차량은 영국의 레이스 엔지니어링 명가 프로드라이브가 튜닝했다.

코스 중간에는 차가 지나갈 수 없을 만큼 폭이 좁아지는 코너가 있다. 이 구간을 스바루 WRX STI는 ‘벽 타기’로 통과해야만 한다. 만의 하나 실패할 경우 차량이 전복될 수도 있다. 이때를 대비해 차체의 보강과 롤 케이지 설치, 운전자를 보호하기 위한 장비들은 필수.

드라이버는 전 영국 랠리챔피언이자 맨 섬 타임트라이얼(Isle of Man TT) 기록 보유자인 마크 히긴스(Mark Higgins)다. 마크 히긴스는 2014년 60.7km의 맨 섬 TT 코스를 스바루 WRX STI 양산모델로 달려 17분 6초 7, 평균시속 187.3km/h로 달렸다.

누구나 달릴 수 있는 길이 아니다. 좁디좁은 코스를 전속력으로 달려야만 한다. 그래야 벽 타기를 성공할 수 있다. 스터드타이어를 장착했다 한들 1300kg에 이르는 쇳덩이를 원하는 대로 운전하는 것은 곡예에 가깝다. 그래서 베테랑 랠리 드라이버에게 WRX STI의 스티어링 휠을 맡겼다.

프로 드라이버의 운전 실력으로도 차의 파손을 완전히 막을 수는 없었다. 좁은 길과 빠른 속도, 여기에 횡가속이 더해지면서 차를 거칠게 벽으로 밀어붙인다. 중요한 것은 최대한 속도를 잃지 않고 달리는 것이다.

스바루 WRX STI vs 봅슬레이 트랙, 승부의 결과는? 많은 설명이 필요 없다. 한 장의 사진으로 충분할 것이다.

전속력으로 질주한 WRX STI는 벽을 타고 올라 좁은 코너를 돌아나가는 데 성공한다. 잠깐이지만 거미처럼 벽에 붙어 달리는 WRX STI, 드라이버에게도 중력을 거스르는 감각이 느껴졌을까. 혹은 그저 무아지경으로 액셀러레이터 페달을 밟으며 스티어링 휠을 잡은 손에 힘을 주고 있었을까?

스바루가 공개한 영상은 현장의 분위기를 생생하게 전달해준다. 영상으로 보고도 믿기지 않을 묘기에 가까운 주행으로 봅슬레이 코스를 통과하는 WRX STI, 그리고 드라이버의 실력은 감탄할 말조차 잊게 한다. 

스바루 WRX STI는 모터스포츠를 통해 우리나라에도 이름이 알려졌고, 소수지만 열정적인 팬을 거느리고 있는 차다. 한동안 WRC에서 스바루의 푸른색을 볼 수 없었던 것이 아쉬웠다. 하지만 스바루는 도전을 잊지 않았다. 비록 국내에서 판매 부진으로 철수한 후 더는 만나볼 수 없는 메이커와 차가 되었지만, 이런 열정적인 도전을 보면 자연스럽게 팬이 되고 응원하게 되는 것은 어쩔 수 없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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